60년대 초는 세계사적으로 격동의 시기였다. 61년 베를린장벽 위기, 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등 미국과 소련의 냉전대결이 최고조로 일촉직발의 시기였다. 미국의 앞마당 쿠바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이끄는 친소련 사회주의 혁명정부가 탄생하여 미국을 위협했다. 61년 미국은 뉴프런티어의 기수 존F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63년 달라스에서 암살을 당했다.
한국은 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정권을 잡은 박 소장은 5.16 혁명의 불가피성을 케네디정부에 인식시키기 위해, 61년 11월14일 미국을 방문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다. 귀국길에 시카고에 들러 시내 드레이크 호텔에 머물면서 유학생 대표로 박해달씨 등을 만났다.
김종필 시카고 들러 한인 구심점 제언
62년 10월, 김종필 정보부장도 한미관계를 돈독히 하기위해 미국을 방문하고,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을 만났다. 미국의 주요 도시를 순방중인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시카고 차이나타운에서, 정보라, 심기영, 박해달, 김태범, 손원태, 하문덕, 이선배, 최종문씨 등 한인사회 주요 인사들과 만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 부장은 “언젠가는 미래동포사회를 이끌어 갈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에 자극을 받은 한인 인사들은 11월 3일 제일연합감리교회에서 모임을 갖고, 초대회장에 정보라 박사, 이사장에 손원태 박사를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의사로 네브라스카주에 살던 손원태 이사장은 북한의 김일성 수령과 친구사이다. 당시 시카고 한인 인구는 수백명 정도 였으며, 회비는 1달러, 창립총회를 위해서 김종필 부장이200달러를 찬조금으로 보내왔다.
이렇게 탄생한 시카고 한인회 역사를 10년 단위로 한인회장의 면모와 업적 및 사건을 정리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