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구회장은 무역도매상인 ‘백 풀라자’ 사장으로 크게 성공하였지만, 사람들은 그를 사장이 아닌 한인회의 회장으로 불렀다. 한인회이사, 상공회의소 회장을 했던 그는 한인회장을 연임했다. 세계적 규모의 큰 단체인 세계한민족무역인협회(OKTA) 회장으로 지도력도 발휘했다. 공인으로 박씨는 사심없는 회장을 했으며, 큰 업적을 남긴 회장 중 한 명으로 꼽힌다. 17대 선거전은 총투표자가 6,426명으로 사상 최대 격전을 벌렸다. 싸움이 치열하다보니 금전선거, 타락선거라는 비난도 높았으나, 한인회장 선거를 통해 전체 동포사회의 한마당 축제로 승화시키고 한인회에 대한 중요성과 관심을 고조시켰다는 점에서 긍정 평가도 많았다. 그는 한인회장 임기 중 사심없이 동포사회를 위하여 열심히 일했으며, 한인회장 을 하는 동안 일생 번돈 50만 달러를 다 썼다는 후문이 있다. 그리고 4년 동안 시카고시청 등 정부단체로부터 12만달러의 그랜트도 받았다. 아이디어도 많았고 추진력도 강했고, 카리스마에 독선적인 고집을 가진 그의 별명은 ‘박정희’였다. 1983년 소련에서 KAL기가 피격되자 다운타운에서 규탄대회를 열었다. 로렌스 한인타운에서 처음으로 한인 퍼레이드를 가졌는데, 폴 사이먼 상원의원, 탐슨 주지사, 워싱턴 시카고 시장 등 정치 거물을 대거 초청했다. 박중구 회장은 여러 단체와 소통하고 협조를 구위해 ‘기관 단체 협의회’를 구성했다. 한인회 회보를 월간으로 발행하여 동포사회에 한인회 소식을 정기적으로 알렸다.